“교회 건물 제일 높은 곳에 무엇이 있나요?”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교회하면 십자가를 먼저 떠올리는 일상에서의 당연함이다. 그러나 그 위에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바로 피뢰침이다.
재난이 일상화된 옛 삶에서는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했다고 생각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인간의 나약함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대로 남아 있다. 한 종교 집단으로 인해 잠잠했던 ‘코로나19’ 전염이 폭발적으로 발생하고 말았다. 이 현상은 수많은 종교인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줬다. 바로 ‘믿음’이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한 종교 단체의 통제되지 않은 행동이 지금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며 기독교계 여러 종단으로 퍼져 나가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이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민과 종교인 간의 갈등이 커져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일부 지자체에서 ‘코로나19’ 확산의 진원지가 종교단체일지라도 구상권을 청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지만 강행하는 이들에겐 불쏘시개에 불과하다. 그들은 벼락에 맞아 죽는다고 해도 신의 뜻으로 환원한다. 재난은 내 앞에 놓인 시험대이며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번 재난이 지나고 나면 시험대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힘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믿음의 씨앗을 뿌리며 사회의 통념을 굴절시키는 역행을 일삼을 것이다. 죽음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것은 분명 초인적인 힘이다. 이러한 힘을 갖기까지의 과정에 나약함의 빈틈은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한다.
‘좋은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을 없앤다. 반면 나쁜 종교는 인간의 두려움을 더한다’는 명언이 있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나쁜 종교가 뿌리내릴 수 있는 좋은 토양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는 않았는가?
‘코로나19’로 얻은 것도 있다.
바로 우리는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그것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국란 때마다 응집된 국민의 힘으로 잘 극복해 왔다. 이번에도 좋은 결말을 맺으리라 굳게 믿는다.
다만 먼저 살아온 사람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가정 본연의 역할을 되살려야 한다. 대가족 체제가 무너지고 핵가족화된 맞벌이 가정의 유대는 그 어느 때보다 엷어졌다. 가정조차도 안식을 누리는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가족들이 무한 경쟁에 자녀들을 내몰며 가정은 경쟁의 출발선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현대 사회에선 경쟁과 외로움은 빛과 그림자와 같은 관계다. 어찌 보면 나쁜 종교에 빠지거나 죽음을 택하는 이들도 살기 위한 최후의 선택일 수도 있다.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안식을 누리려는 갈망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코로나19’ 재난이 가정과 우리 공동체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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