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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인터뷰] 약관(弱冠)의 사업가 ‘맛칼’의 박대성 부사장
군 자원입대에서도 배울 점 찾는 도전정신
안주하려는 개인·기업·정부에 시대정신 보여줘
기사입력: 2018/10/09 [13:59]  최종편집: kyungin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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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안산=김태형 기자]

 

살기가 힘겹다고 아우성이다.

대기업의 사내유보금이 천문학적으로 쌓여 있고 그 어느 시기보다도 부유한 이들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매일 아침 경제 신문 1면은 곧 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처할 것처럼 묘사한다. 국가는 부유하지만 국가가 위기인 것은 도대체 무슨 모순된 논리일까?

기업도 개인도 현실적인 가치는 안주(安住)’에 방점을 찍고 있다. 온갖 매체를 통해 혁신’, ‘도전을 남발하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결국 국가의 위기는 기업도, 개인도 아이러니하게 안주(安住)’를 추구하면서 발생했다.

 

살림이 좀 어떠냐?”는 물음에 죽지 못해 산다고 하는 요즘 세태에 한 젊은이의 선택이 묘수로 떠오르고 있다. 그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솔로몬의 판결처럼 다가온다.

 

오늘 인터뷰 주인공은 바로 박대성 맛칼 부사장이다.

맛칼은 증산동에 위치한 칼국수 전문점이다. 그는 불과 20살의 사회 초년생이다. 그럼에도 당당히 이곳 매장의 부사장으로 종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원입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99년 사회 초년생의 당찬 포부를 들어 보고 그를 키워낸 주변 환경을 조명할까 한다. 이를 통해 우리사회의 모순된 병폐를 치유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    칼국수 전문점 맛칼의 박대성 부사장  © 경인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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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일본 유학생활 포기

박대성 씨는 사업가의 꿈을 실현하면서 오랜 기간 준비한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인 대학에서 전기·전자 공학도의 길을 접은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착실히 준비해서 입학한, 그리고 잘 다니던 대학을 포기한 직접적인 계기가 궁금했다.

 

이에 대해 박 부사장은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기능영재반을 뽑아 전국대회를 준비했었는데 저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학년 당 2명씩 총 6명을 선발했습니다. 평소 문제 해결에 있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학생이 주 선발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실망이 컸습니다. 부푼 마음에 첫 수업을 받았으나 과정 보다는 주입식 교육 위주였습니다. 그리고 정해진 문제만 반복했습니다. 사람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에 계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선생님과 학생들은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전국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공학도의 꿈을 갖고 일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서도 동기들 모습에서 역동적이기 보다는 비전 없는 수동적인 모습에 저의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회생활도 주어진 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라며 지난 일들을 들려주었다.

 

-. 칼국수 전문점 맛칼

그래서 시작한 첫 사업이 칼국수 전문점 맛칼이다. 이름부터 독특하다.

 

고민을 했습니다. 손님에게 세련되고 읽기 편하며 기억에 남는 브랜드가 어떤 것이 좋을까하고요. 그렇게 고민한 끝에 탄생한 이름이 맛칼입니다

 

역시 세련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단 두 자로 맛깔스럽게 표현한 상호다. 박 부사장의 맛칼2호점이다. 모친인 김정완 대표가 운영하는 맛있는 칼국수1호점이다. 박 부사장은 본인이 운영하는 전문점에 모친의 상호를 쓰지 않고 자신만의 브랜드를 창안했다. 그의 꿈은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칼국수 비법에 경영인 마인드를 덧붙여 체인사업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과감히 안정될 수 있는 길을 포기하고 젊은 나이에 맛칼의 부사장이 되었다.

  

▲  왼쪽부터 동서남북교회 서재필 담임목사, ‘맛칼의 박대성 부사장, ‘맛있는 칼국수김정완 대표    © 경인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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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자원입대 결심

 

군대에 다녀오면 철이 든다지요?”

 

19세 청년의 입에서 귀를 의심하는 말을 듣고는 기가 찼다. 허무맹랑하게 들렸지만 이어지는 말에서 이 청년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왜 들어 왔는지 길지 않은 시간에 깨달았다.

 

군대에 가서 특별하게 배우는 것이 있기에 철이 든다고들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2년을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 한 것들을 배우는 시간으로 삼겠습니다

 

그의 병과도 참 독특했다. 바로 운전병이다. 요식업에 종사하기에 당연히 취사반을 지원할 줄 알았는데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유 또한 깊이가 있었다. 정해진 맛을 반복하기 보다는 지휘관들의 리더십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다. 더 이상 질문이 무색할 지경이다. 군 입대 전 세상 끝날 것 같았던 필자의 마음가짐하고는 천양지차라 난 뭘 배우고 제대했나 싶다.

 

-. 스승이신 어머니 김정완 대표

박 부사장의 어머니 김정완 대표도 맛에 승부를 건 여장부다. 칼국수 전문점을 하기 전 맛으로 인정받은 반찬가게 운영자였다. 그러나 적자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지인의 칼국수 전문점을 인수한 후 불과 3개월 만에 흑자로 돌린 저력의 소유자다. 지금은 지역에서 대기자가 줄을 설 정도의 소문난 맛집으로 성장시켰다.

 

박 부사장은 이런 어머니에 대해 어머니의 격려와 지지가 없었다면 지금 저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매 중요한 시점에 반대하기보다 충분히 아들의 의견을 경청해 주고 스스로 내린 결정을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 대학으로의 입학과 자퇴 그리고 자신의 꿈을 키우기 위해 내린 결정에는 어머니 김정완 대표의 믿음이 함께 했다.

  

▲  시대를 앞서간 서재필 목사- 동서남북교회 서재필 목사는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아니다. 어머니 한 분을 제대로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홀연 단신으로 196516살 나이에 상경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에게 서울은 도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지 않고 10대 후반부터 우산공장에 보증을 서고 부랑 청소년들에게 우산 장사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20대에는 아마존 윤형주 사장으로부터 집 한 채 값을 주고 구둣방을 사들여 3개월 코스로 구두 닦는 법을 무상으로 가르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자신의 방 두 칸을 터서 당시 5만원 상당의 호마이카 전축을 구비해 어머니와 동네 어르신들의 노인정을 마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복지정책에 있어 수십 년을 앞선 방식이었다. 단순히 주는 복지에서 일할 수 있는 복지를 그는 약관의 나이에 실천한 것이다. 서 목사는 당시 기이하고도 불가사의한 인물로 지역 사회에 알려졌다. 서 목사 자신은 이런 남다른 행동의 배경에 무과급제 후 통정대부 겸 오위장을 지낸 3대조 할아버지인 서창종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전사한 큰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가풍과 집안의 내력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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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버팀목 동서남북교회

김정완·박대성 모자의 성공 여정에는 동서남북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박 부사장은 동서남북교회와의 인연을 생후 16개월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 이어오고 있다. 11녀의 장남인 박 부사장은 아버지, 어머니의 가르침과 더불어 교회에서의 배움도 성장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새벽 예배에 자주 다녔습니다. 고등학생 때에는 친구들이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깝지 않냐고 자주 묻기도 했습니다. 사실 주일에 놀러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재필 목사님께 많은 것을 배웠고 남다른 생각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멍한 표정으로 수업에 임하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외에 이면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교회에서 키웠습니다

 

박 부사장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금수저 출신이 아니다. 그의 가정은 부모님들이 열심히 사셨지만 윤택하지는 못 했다. 그러나 믿음과 신의가 깊었던 어머니를 교회에선 신뢰했다. 그리고 어머니 지인이 칼국수 전문점을 개업하는데 동서남북교회 서재필 담임 목사가 깊이 개입해 매점 위치와 융자를 받는데 보증을 서는 등 도왔다. 그러나 지인의 경영이 어려워지고 관리비까지 못 낼 지경에 서 목사는 김 대표로 하여금 운영을 독려했고 예상은 적중해 지금은 소문난 맛집으로 성장시켰다.

 

2호점 탄생 배경에도 서 목사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서 목사 부인이 운영하던 상가와 어린이 도서관을 리모델링해서 지금의 맛칼’ 2호점이 탄생했다. 보증금 1억 원에 월세가 300만 원에 육박하는 상점을 과감히 한 청년의 창업 인큐베이터로 제공한 것이다. 인테리어 비용만도 8천여만 원이 소요됐다. 서 목사의 기행은 목사로 안수받기 훨씬 전부터 시작된다. 동서남북교회 담임목사이면서 국민권익위원회 소관 사)부패방지국민운동총연합 중앙감찰위원장으로도 활동하는 서 목사는 청소년 시기부터 지금까지 청소년 선도와 건강한 가정 돌봄에 역점을 두었다. 박사학위 논문인 가정회복을 통한 성공적인 청소년 목회에 관한 연구에서도 그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이론뿐만 아니라 실무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경력자다.

 

최근 수많은 목회자가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다. 과거 천막 교회부터 시작해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보여 줬던 거목들이 지금은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교회 외형에 치중하며 스스로 바벨탑의 저주를 받고 있다. 동서남북교회는 수십 년 동안 증산동 상가에 입주해 있으면서 외형이 아닌 자신과 가정, 나아가 국가에 기여할 사람에게 끊임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이는 교인이 아닌 이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교회라는 어원은 신학적으로 건물 외형을 뜻하지 않고 믿는 이들의 집단 자체로 규정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동서남북교회는 증명하고 있다.

 

한 젊은이의 기개와 그 기개를 유감없이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동서남북교회의 모습에서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업은 이윤을 창출하는 집단이다. 그런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고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는 것은 바로 도전을 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이로 인한 부작용을 극복하는 몫은 정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안주(安住)’하는 순간 위기는 닫친다. 위기가 기회이며 도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국민도, 기업도, 정부도 박대성 부사장의 기개와 뜻을 깊이 새겨 실천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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