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도 유족들, 동생의 죽음이 승화되기를...

김태형 | 기사입력 2017/10/17 [10:20]

구봉도 유족들, 동생의 죽음이 승화되기를...

김태형 | 입력 : 2017/10/17 [10:20]

낙조가 아름다운 구봉도 앞바다에 침묵이 흘렀다. 깊은 침묵 사이로 배어 나온 흐느낌이 이내 통곡으로 변하여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지난 827일 해질녘 모여든 구봉도 주민들의 시선은 제상 위 영정을 향했다. 영정의 주인은 김 모 씨(61년 생, )였다. 고인은 소중한 자신의 삶을 마지막 열정을 쏟아 부은 일터에서 스스로 거둬들였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다. “?”라는 의문만이 머리를 맴돈다. 8남매 막내로 태어나 형제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라온 그였다. 교수·사업가 등 성공한 형님과 누님들이 장성한 후에도 막내였던 고인을 애틋하게 챙겼다. 아들 또한 유수의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준비하는 등 부러움에 대상이다. 횟집을 운영했지만 동일 업종의 매장이 두 곳이나 이웃하고 있다. 불황이 혼자만의 일도 아니었을 터였다.

고인은 ?”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     ©경인투데이

 

봉도의 비극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 지난 821일 월요일, 그는 짧은 유서를 남겼다.

가족의 동의를 얻어 어렵게 유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또 한 가지는 이 지긋지긋한 00상가를 끝내 주세요. 철저한 조사와 수사를 부탁합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이어간 후 특별히 강조해서 특히 000 00을 조사하여 벌하여 주세요라며 누군가에게 절규하듯 호소했다.

 

구봉도에서의 안타까운 비보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주민에 따르면 세 번째라고 이구동성으로 증언을 한다. 2015년부터 매해 한 번씩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분들의 죽음에는 공통된 인물이 있다. 결코 편한 관계가 아닌 그러나 이웃하고 있어 보기 싫어도 봐야하는 인물.

 

첫 번째 죽음의 그림자: 첫 번째 희생자는 공수부대 출신이며 해방둥이인 주 모 씨(45년생). 80년경 구봉도에 정착했던 한 주민은 그 전엔 참 평화로웠다. 그러나 000이 들어오면서 시끄러워 졌다고 회상했다. 주 씨의 사인은 급성 간경화였다고 한다. 건강했던 그가 죽음으로 몰린 것은 이웃과의 잦은 불화로 스트레스가 극심했을 것이라는.....

 

주민에 따르면 “2014년 가을, 형님께서 봉변당해 죽을 맛이다라고 토로했다고 증언하며 그의 죽음 후 “00000 잘 죽었다’, ‘나한테 까불면 다 죽는다라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도 증언한다. 000이 구봉도에 정착하면서 주 씨와 이웃했고 식당 영업과 관련해 자주 마찰이 생겼던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의 그림자: 안타까운 죽음은 다음해인 2016년으로도 이어 졌다. 희생의 당사자는 바로 주 씨의 부인인 김 모 씨(58년생)였다. 주민들은 그녀의 죽음을 미스터리한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다. 주민에 따르면 전날 눈이 왔다. 그래서 더 잘 기억한다. 바람이 전혀 없었다. 검은 연기가 해안가에서 치솟았다. 불씨가 날릴 날씨도 아니었다고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졸지에 고아가 된 자녀들을 걱정했다. 그녀는 화재로 인해 샌드위치 판넬지어진 집에서 한 줌의 재가 됐다. 화재원인은 돼지머리를 삶다가 불이 옮겨 붙어 화재가 났다는 것이다. 그 돼지머리를 000이 주었다는 것도 뒤늦게 알려 졌다. 여러 개의 그물망을 놓고 생계를 이어갔던 부부는 어망이 축소되면서 식당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갔지만 삶의 끝이 이처럼 비참했다.

 

벌하여 주세요

그는 극단적인 선택이 있던 전날 냉정할 정도로 침착했다.

횟집에서 일손을 돕고 있던 친 누나와 친구에게 외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곳으로 가려니 생각했지만 그는 양수리로 방향을 잡아 점심을 하고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예전 같으면 분주한 시간이었지만 당시에는 양수리로 외식을 할 정도로 매장은 한산했다. 누구도 그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 했다. 그렇게 그는 신변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인들에 따르면 처음부터 불황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는 20년 전 00상가를 분양받아 세를 주었고 세입자가 나가면서 승계 받아 영업을 시작 했다. 당시 그의 옆에는 000가 있었다. 000의 제안을 받아 사업을 확장했고 영업은 승승장구했다. 매장 앞 토지에 방갈로도 제안 받아 세를 주고 확장했고 000 소유의 앞마당에는 그의 매장을 찾는 버스만이 출입이 가능했다. 더구나 전국버스연합 회원에도 가입되어 15km 마다 지정되는 회원사로도 등록되어 수시로 대형 버스가 매장 앞을 채웠다. 영업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하지만 잃은 것도 많다고 한다.

먼저 이웃을 잃었다. 그의 매장은 하루가 다르게 번창했지만 이웃들은 극심한 어려움에 직면했다. 주차가 어려워 찾는 손님이 끊겼다. 더구나 000의 행위는 지역 주민들과 어깃장이 나기 일쑤였다. 000는 경매를 통해 마을 곳곳의 땅을 사들였고 주민들은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평소와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마찰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주민들과 000 사이에 고소고발이 난무했고 본의 아니게 그 중심에는 그가 놓이게 되었다. 번영회에서도 강제 탈퇴 당하며 대리전에 끼면서 본점인 매장이 폐쇄되었고 옆 매장 두 곳을 사들여 영업을 이어갔다.

 

그런 와중에 000소유 방갈로 토지의 임대 기간이 지난 6월에 종료되었고 매장으로 드나들 수 있었던 입구 쪽 토지에 자동차가 주차되면서 버스의 출입이 제한됐다. 그 후 그의 처지는 이웃 상가와 동병상련이 되었다. 000와의 계약 관계를 정확히 설명해줄 증인은 없다. 그가 왜 계약 관계를 더 유지하지 못 했는지도 모른다. 단지 지난 수년간의 번창을 누렸던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을 것이라는 건만 짐작할 뿐이다.

 

또다시 오리무중에 빠졌다.

? 그는 특히 000 00을 조사하여 벌하여 주세요라고 최후의 절규를 남겼을까? 살아 있는 자들의 숙제가 되었다.

 

내 동생의 죽음이 승화되기를..... ”

진혼제가 지난 827일 오후 630, 그의 터전이고 꿈을 키워온 00횟집 앞에서 개최됐다. 살아생전 불편했던 이웃과의 화해를 위해 유족들이 주도하여 개최된 거룩한 진혼제였다. 이웃 주민들도 참여했다. 진혼제에서의 유족들의 슬픔은 참석한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눈시울을 붉히게 했다. 특히 큰 누님의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맴돌고 있다. 구봉도의 석양도 오늘따라 서글프게 느껴졌다. 누님의 절규 중 "어린 동생 아파서 먼저 죽어 땅에 묻을까 걱정이 되어 십 수 킬로를 뛰어 약을 사다 먹였는데 이렇게 먼저 가니 내 동생 불쌍해서 어떻하나...." 가족들은 쏟아지는 눈물로도 그 한을 씻어내지 못했다.

 

지난 9월 중순 그는 번영회 임시총회에서 회원으로 복권됐다. 그것도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에게도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 자리에 둘 째 형님이 참석했다. 그리고 진심어린 말을 남겼다.

제 동생이, 생각이 짧아 잘못된 선택을 해서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주민들께서 용서해 주시고 화합하시게 되면 제 동생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말도 남겼다.

우리 유족들은 진상을 끝까지 파헤치겠습니다

 

주민들의 화답도 있었다.

우리도 최대한 돕겠습니다

 

끝나지 않은 죽음의 그림자

그는 갔어도 아직 구봉도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맴돈다. 이기심이 부른 불행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유서에는 생활고가 아닌 누구에 대한 원망이 깊게 서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 의해 생활고로 인한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 졌다. 도대체 누구에 의해 사자의 명예가 훼손된 것일까? 가해자는 잘 알 것이다. 유족에게 망자의 자살 동기도 묻지 않고 세상에 알리게 한 그 누군가는 이번 사건이 불행의 끝이 아닌 진행 중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죽음의 그림자는 언제쯤 멈춰질까?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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