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 한 영웅, 세월호 의사자(義死者) 정차웅

“안전만큼은 앞서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승화”

김태형 기자 | 기사입력 2017/01/16 [16:14]

우리와 함께 한 영웅, 세월호 의사자(義死者) 정차웅

“안전만큼은 앞서서 전화위복의 계기로 승화”

김태형 기자 | 입력 : 2017/01/16 [16:14]

 

▲  의사자 정차웅 군이 있기까지 노력한 안산사람들(왼쪽부터 안산시청 기획법무과 도원중 계장, 안산시청 회계과 김화궁 실무관, 박태순 전 소통전문위원, 차웅 군 아버지 정윤창 님, 평생학습원 교육청소년과 안산시 혁신교육지구 사업담당 손상경 교육특구계장)


2014
415일 인천항에서 청해진 해운의 세월호에 단원고등학교 학생 325, 교사 14, 일반인 104, 선원 33명이 승선해 오후 9시에 제주도를 향해 출항했다. 그러나 416일 오전 850분경 세월호는 전복되고 418일에 완전히 침몰하게 됐다. 이 사고로 탑승자 476명 중 사망자 295, 실종자 9명이 발생하고 생존자는 172명에 그쳤다.

 

원인은 무엇일까? 대형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정부에 대한 불신만 키우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3주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고들 얘기한다. 메르스 사태, 조류인플루엔자 사태 등 우리 사회는 웬만한 사건·사고는 관심 축에 들지도 못 할 정도로 불안해 졌다. 세월호 사태 이후 안타까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한 가닥 희망의 소식이 전해 졌다.

 

보건복지부가 201610274차 의사상자심사위원회를 개최해 정차웅 군을 의사자로 인정한 것이다. 정차웅 군은 세월호 선박이 침몰할 당시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친구를 위해 자신이 입었던 조끼를 벗어줬다. 그 후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돼 부모 곁으로 돌아 왔다. 정차웅 군 의사자 지정에는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안산시 공무원들의 숨은 공로가 컸다.

 

세밑 한파가 몰아친 지난달 1229일 한양빌딩 3층에 의사자 정차웅 군 아버지 정윤창 씨와 안산시 소통위원회 박태순 전 전문위원을 비롯해 당시 주역이었던 안산시청 기획법무과 도원중 계장, 평생학습원 교육청소년과 안산시 혁신교육지구 사업담당 손상경 교육특구계장, 안산시청 회계과 김화궁 실무관, 안산시청 안전사회지원과 안규산 계장, 단원구청 행정지원과 이갑순 계장, 안산시청 복지정책과 박경혜 계장 중 도원중 계장, 손상경 계장, 김화궁 실무관 등 5명이 모여 당시 의사자 선정 과정에 대한 대화와 앞으로 안산시가 가야한 과제를 논했다. 박태순 대표의 진행으로 한 시간여 진행됐으며 앞으로 꾸준히 세월호 관련 내용을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다.

 

박태순 전문위원: “차웅이는 부모에게 어떤 아들이었나요?”

 

의사자 정차웅 부친: “딸이었어요. 딸처럼 잘 했어요. 큰 애도 말이 적었습니다. 차웅이는 집안 분위기 메이커였습니다. 차웅이가 한창 크는 중이었습니다. 체격도 좋고 검도도 하고.....”

 

박태순 전문위원: “다음 글은 한때 트위트 상에서 회자되었던 내용입니다.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트위터 정서희 씨

엄마가 친구 분과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시는데 검은 정장 입은 남자 분이 일어나시더니 주목해달라고 하셨다고 한다. 본인은 정차웅 군 아버지인데 오늘 장례를 치르고 오는 길이라고, 응원해준 국민들한테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면서 테이블마다 소주 한 병씩을 돌리고 가셨다고 했다. 가슴이 아파서 계속 눈물만 난다. 가장 힘들 당사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한다. 당신이 함부로 지껄인 미개의 수준은 이 정도다.”>

 

의사자 정차웅 부친: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고 집 앞 감자탕집에서 저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서 처남이 제안을 했습니다. 소주 한 병씩을 돌리고 가자고요. 그렇게 돼서 나오게 된 얘기입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박태순 전문위원: “아버님의 요즘 근황은 어떠신가요?”

 

의사자 정차웅 부친: “직장에 다니고 있고 주말에는 광화문으로 갑니다. 세월호 가족들과도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박태순 전문위원: “세월호 가족과 함께 고생하시는 분들이 여기 계시는 공직자 여러분들이십니다. 정차웅 군 의사자 인정에 숨은 공헌자라고 하는데 정작 소개된 적이 없었습니다. 개인 소개와 과정을 설명 부탁드립니다

 

의사자 정차웅 부친: “참 고생들 많이 하셨습니다

 

손상경 계장: “자세한 설명을 드리려면 동료 직원이 와야 하는데 동원중 계장이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조심스럽고 여러 가지 본 것들도 많고 더구나 현직이다 보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세월호 당일인 416일에 진도로 내려가면서 큰 일이 아니라고 알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포 IC에 차를 대기하라는 상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차웅이 아버지를 모시고 목포한국병원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계속 뉴스는 듣고 갔는데 아버님을 모시고 목포한국병원 지하에 가보니 이미 난리가 나 있었습니다. 아버님과의 첫 대면은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사고는 났지만 차웅이를 데리고 안산으로 올라가고 싶다고 말씀을 하시고 차편을 구해 올라온 것입니다. 그때 아버님이 보시기 전에 차웅이를 영안실에서 처음 봤습니다.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차웅이가 첫 번째로 헬기 이송됐는데 시간이 좀 흘러서 그때 같이 동승하신 분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헬기 안에서 구조대원들이 차웅이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웅이가 조끼를 벗어 주었다는 얘기가 회자가 됐었고 우리는 경황이 없다 보니 그런 일이 있었나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태순 전문위원님께서 뭔가 이상하다’, ‘잘 챙겨봐라’,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취지의 전화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소통위원회 멤버들에게 실질적으로 추적을 해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이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경황은 없었지만 그렇게 해서 이 일들이 진행이 됐습니다.

 

그 이후에 제가 47일간 진도체육관에서 근무를 마치고 올라와 얼마 안 있다가 총리실 국무조정실로 세월호지원단 파견을 나갔습니다. 파견을 나가보니 의사자 지정 문제가 계속 지연이 되고 있었습니다. 너무 민감한 문제가 많았습니다. 특히 학생이고 어떻게 풀어 가야 될지의 고민이 그 당시에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유가족들이 어떤 언론 기사에서 나왔듯이 전체를 의사자 지정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깐 서로서로가 어쨌든 조심스러워서 공식적으로 심의가 되기 전이었습니다. 저희는 안산시와 국무조정실, 보건복지부 사이에서 어쨌든 이 문제가 언제가 적정하고 어떻게 진행을 해야 할 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안산시에 있는 복지정책과 생활보장계장인 박경혜 계장에게 도움도 청하고 수시로 회의도 했습니다. 한번 심의가 끝나서 보류가 되면 다시 심의를 받기는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의를 잠시 보류해 놓고 아버님과 상의를 해서 적합한 시기를 잡아 보자는 취지의 대화도 나눴습니다. 그 과정에서 차웅 어머님께서 받은 명함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아일보 박성진 기자 명함이었습니다. 박 기자께서 본인이 분명히 최초 구조된 아이에게 차웅이가 구명조끼를 벗어 줬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누구와 인터뷰를 했는지는 파일이 너무 많아서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핵심 증언을 찾기 위해 단원고등학교 스쿨닥터 김은지 정신과 선생님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생존학생들을 돌봐주는 선생님이십니다. 생존학생에게 인터뷰를 부탁했습니다. 차웅이 구명조끼를 입은 아이가 누군지 찾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신학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너무나 큰 사건이었기 때문이지요. 김은지 선생님께서 최선을 다 하셨는데 없다고 하셨습니다. 못 찾아냈습니다. 우리 내부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간접 증언이 의사자 선정에 받아들여진 경우를 찾아 보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의사자 지정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대상자가 많지도 않고요. 찾아 봤지만 간접증언이 받아들여진 경우가 애석하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동아일보 기자님과 김은지 선생님께서 의견서를 써 주신 겁니다. 아이들이 받았는데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은 트라우마라고 한답니다. 의사들이 보기에는 치료가 약 10년 이상 걸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심사 시기를 9월 달 경으로 봤습니다. 큰 틀에서 인양시기를 10월로 봤기 때문입니다. 인양시기가 있기에 심사위원회의 심리적인 사항까지 점검하며 타이밍을 잡고자 했던 것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현직에 계신 분도 계셔서 더는 말씀드리기가 곤란하지만 참 많은 분들이 고생하셨습니다.

 

진실은 동아일보 기자가 인터뷰한 사실은 팩트였다는 것입니다. 위원회에서 인정하기에는 논란 대상이었지만 현직 기자와 첫 번째 구조된 아이에게 들었던 것이 사실이었기에 언론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제게도 의사자 지정 과정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안산시 공무원들도 참 어려웠었습니다. 그냥 자료만 올린다고 지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큰 힘이 되어 주신 분은 차웅이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께서 공무원인 저희를 믿고 기다려 주신 것이 지금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렸어도 믿고 기다려 주셔서 선제적으로 문제점을 짚어 가며 의사자 지정에 대비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   의사자 정차웅 군


박태순 전문위원
: “세월호 사태를 통해서도 아직 우리 사회가 변한 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근거 없는 억측으로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며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이들의 숭고한 뜻이 꽃피지를 못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손상경 계장: “우리 안산시에서 세월호추모공원 설립 문제가 혼란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가족과 시민의 일로 보이지만 사실 제 자신은 이 문제가 우리 안산시민의 문제라고 봅니다. 저희 교회만 하더라도 두 아이가 희생되었습니다. 더구나 화랑유원지 옆에 있습니다. 킹콩도서관에 있는 모 교회는 8명의 아이가 희생됐습니다. 그래서 당사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가족 입장에서 이 문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결국 상처로 남게 됩니다. 접근 방식이 유가족들의 억지라는 쪽보다는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향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특히 이스라엘 같은 경우는 시내 중심에다 유대인학살기념관을 짓고 지금은 전 세계적인 방문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 안산에서도 얼마든지 치밀한 기획을 통해 안산시 정체성을 찾는 기회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차웅이의 의사자 선정이 이 문제를 푸는 첫 키워드가 되리라 봅니다. 우리가 의사자의 의미를 되새기고 희생의 숭고한 뜻을 우리 안산시에서 펼쳐야 합니다

 

김화궁 실무관: “주로 사무실에서 현장 분들과 소통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대부분의 직원이 현장에 종사하셨습니다. 차웅이는 뉴스에서 처음 보게 되었고 그 후 박태순 전문위원님께 차웅이 아버님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의사자 신청과정을 알아봐 달라는 현장의 요청이 있어서 그런 업무를 준비했습니다. 아버님을 만나 설명도 드렸습니다. 늦게라도 선정이 되어 너무 기뻤습니다. 감사했어요. 아직까지는 우리 세상이 좋은 곳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의사자 정차웅 부친: “많은 공직자 분들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신뢰가 갔습니다. 그래서 믿고 기다려 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직도 기뻐하기에는 마음이 무겁습니다

 

손상경 계장: “초기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습니다. 문의할 곳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럴 때 도 계장님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첫날부터 47일 간 같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이혼 당할 뻔 했습니다. 도 계장님만 쫓아다닌다고요

 

도원중 계장: “제가 진도로 가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손 계장님께 내려와 달라고요. 저도 감당이 안 되더군요. 걱정됐습니다. 그런데 흔쾌히 승낙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차웅이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손 계장님께 팽목항까지 오시지 말고 중간에 아버님을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손상경 계장: “! 그러면 그때 안산시에서 한 것이 아니라 도 계장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군요?”

 

도원중 계장: “괜히 내려 오셨다가 올라가시면 안 될 상황이어서 제가 손 계장님께 전화드렸던 것입니다

 

손상경 계장: “특별한 인연이네요?”

 

도원중 계장: “그렇지요

 

박태순 전문위원: “정차웅 군의 의사자로서 인정되었습니다. 우리 안산시민 더 나아가 국민이 어떻게 그 의미를 기려야 할 지 고견을?”

 

손상경 계장: “저는 젊은 학생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어른들의 입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지만 누구나 행동하지 못 했습니다. 위기 때 행동할 수 있었던 차웅이의 모습에서 위기 때 내 것을 버리고 뛰어 들 수 있는 동력, 첫 단추를 끼웠다고 봅니다. 가족 분들에게는 힘들지만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잘 연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지금은 이 정도 수준이지만 때가 되면 우리가 더 언론에서 취재해 주시고 다뤄봤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학생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김화궁 실무관: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고가 재발했을 때 슬기롭게 더 잘 대처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추모공원을 통해 그 의미가 이어졌으면 합니다

 

의사자 정차웅 부친: “가슴 아픈 일이지만 후세 사람들에게만은 더 이상 슬픔이 없었으면 합니다

 

도원중 계장: “저희 집 옆에 상가에 정우성 정형외과가 있습니다. 팽목항에 있을 때 몸이 안 좋아서 이틀 올라와서 병원 치료 받고 내려가는데 마침 병원에 가니깐 간호사님이 차웅이를 잘 아셨나 봅니다. 차웅이가 태권도장을 다녔나봐요

 

의사자 정차웅 부친: “바로 그 병원 앞 상가에 도장에 다녔습니다

 

도원중 계장: “차웅이가 태권도를 하면서 아이들을 잘 다독였다는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너무 슬프다며 차웅이 얘기를 해 주셨는데 그때 차웅이가 이런 아이였구나를 느꼈습니다. 주변 사람이 그런 얘기를 할 정도였으면 짧은 생을 살았지만 잘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아버님이 수위 문제부터 장례까지 그때는 규정이 없어 참 애로사항이 많았잖아요. 그때 아버님께서 세금도 내 돈이라는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가지를 생각했을 때 역사는 만들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들이 기록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저희들도 팽목항에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긴박한 순간에 어른들도 못하는 판단을 했는지 감동을 받았습니다.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가 단원고 3학년에 됩니다. 유가족 분들과 같은 마음입니다. 부정적인 얘기를 많이 하지만 내 가족이라면 그런 소리 못 합니다. 앞으로 들어설 기념관에 그 의미를 반영해야 합니다

 

박태순 전문위원: “당시 대책회의에서 위기 상황을 누가 잘 대처할 것이냐는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도원중·손상경 계장님에 얘기가 나왔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이 47일 간 팽목항에 선발대로 와서 고생을 하신 것입니다

 

도원중 계장: “초기 매뉴얼도 빈약해 우리 안산시에서 만든 매뉴얼을 타 기관에서 가져가는 등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희들 역량을 검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너무 큰 희생의 대가라 안타까울 뿐입니다. 좋은 유가족 분들도 뵙고 이런 일을 더 이상 없어야 하겠습니다

 

손상경 계장: “노하우들이 있으니깐 우리 안산도 시 실정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 안전에 있어서만은 앞서가는 모습이 전화위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박태순 전문위원: “1시간여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세월호 관련 기록이 더욱 폭넓고 깊게 기록되어야 합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지면을 할애해 당시 현장과 실무에 참여 하셨던 분들의 기록을 통해 후대에 이 슬픔을 우리 세대가 어떻게 극복하고 재발 방지에 노력했는지를 보여줘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구가 대구지하철 참사로 34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 그 참사를 잊지 말아야한다며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산시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시민이 안전하고 기업하기 좋은 안산을 전국의 안전도시 메카로 만들어야 합니다. 안산시는 스마트허브(반원·시화공단)를 배후로 한 도시인데 스마트허브는 전국산업단지 중 가장 많은 산업재해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유해·위험 요소가 많을 뿐만 아니라 우범도시로의 저평가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대구 시민안전테마파크보다 더 큰 그림으로 세월호참사, 산업재해, 일상생활안전까지를 내포해서 안산을 안전도시의 메카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방자치시대의 지역 언론이 그 역할을 충실히 기록해야 합니다감사합니다.

 

정리/김태형 기자(kimsimon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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